헌재 재판소원 금지 조항 삭제는 헌법 아닌 헌법재판소법 제 68조 개정으로 가능
대법관 증원에 대한 반대는 법원 내 위계적 불평등 강화에 기여
불공정 재판을 ‘법의 지배’로 ‘입틀막’하고, 신속만 강조하는 ‘저명 법학자들’
법관의 자긍심 존중이 아니라 잘못된 재판의 법관에 대한 처벌 강화 필요
작년 대법관직에서 퇴임한 김선수(64·사법연수원 17기)가 최근 회자하는 대법관 증원에 대해 장문의 글을 통해 부정적 입장을 피력했다고 한다. “대법관 증원은 하급심 강화라는 법원의 근본적 개혁방향과 어긋나는 측면이 있다”, “대법관 증원이 여러 번 시도된 적 있고 최고법원 위상 추락, 정책적 판단 기능 약화 등의 문제점이 지적됐다”, ‘개헌 없는 헌법재판소 재판소원 도입은 위헌“ 등 발언이 그러하다.
김선수는 참여정부 사법개혁 작업을 이끈 대표적 진보 성향 법조인으로 알려져 있다. 27회 사법시험에 수석 합격했지만 변호사의 길을 택했고, 첫 직장이 '인권변호사'의 대명사인 고 조영래 변호사의 시민공익법률사무소였으며, 대표적 노동·인권 변호사로 일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 때 김명수 전 대법원장 제청으로, 판사 출신 아닌 이로서, 대법관(2018.8.~2024.)으로 재직했다.
대법관에다 진보 성향 법조인의 경력을 두른 김선수의 주장이 타당성을 가진 것처럼 횡행하고, 시민 민중이 그의 주장을 권위 있는 것으로 무분별하게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자칫 극장의 우상이 된다. 김선수가 유보 없이 자신의 견해를 절대시하고, 중의(衆意)에 귀 기울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독선인 것으로서, 무엇보다 절차상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대법관이든 아니든, 누구나 편견, 오류의 한계를 피해갈 수 없으므로, 의견은 제시하되, 판단은 공론에 맡겨야 하는 것이겠다.
그런 취지에서, 여기서는, 김선수가 주장한 내용의 절대적 가치, 타당성 여부의 담론은 차치하고, 주장 자체에서 노정되는 상호 모순과 자의적 독선을 지적하기로 한다.
첫째, 김선수는 헌재에 재판소원(판사가 잘못 재판한 것을 헌재에 소원하는 것)을 도입하는 것이 위헌이라고 하고, 독일에서는 재판소원을 제도화하고 있으나, 한국에는 재판소원하면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황희(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반론에 따르면. 이 같은 김선수의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황희 교수에 따르면, 김선수는 ”헌법 제 5장 법원과 제 6장 헌법재판소를 병렬적으로 배치, 각각 독립된 헌법기관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독일 기본법은 제 9장 사법의 장에서 연방헌재와 다른 법원을 함께 규정하고 있으므로, 독일은 재판소원을 인정하나, 우리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황희의 반론에 의하면, 무엇을 헌법재판의 대상으로 정할 것인가는 헌법재판소를 헌법 내 어떤 장에 편성하는가 하는 것과 무관하다. 법률에 대한 위헌심사를 하기 위해 헌법재판소를 입법의 장에 규정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재판에 대한 위헌심사를 하기 위해서 헌재를 사법의 장에 규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참조 사이트 : 최창호 변호사 사이트 https://m.blog.naver.com/cchchw/223897211774)
둘째, 김선수는 재판소원 도입에 우선 반대하면서, 헌재가 재판소원하도록 하려면, 법률만 고쳐서는 안 되고, 개헌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다. 재판소원 금지는 헌법이 아니라, 하위 법률인 헌법재판소법 제 68조에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위법률만 고치면 된다는 뜻이다.
김선수는 이 제 68조가 어떻게 하위 법률 헌법재판소법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그 내력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987년 헌법이 제정된 후, 그에 따라 헌법재판소가 창설된 후, 헌법재판소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논란이 있었다.
김웅의 <검사내전>에 따르면, 입법에 참가한 이들 중, 일부에서 재판소원을 금지하자고 했으나, 다수가 그건 말이 안 된다고 하고, 재판소원 금지 조항을 넣지 않기로 정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밤 재판소원 금지 조항이 헌법재판소법 제 68조로 은밀하게 삽입되었고, 그런 줄도 모르는 이들이 그다음 날 헌법재판소법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이를 두고 김웅은 입법 쿠데타라 규정한다.
재판소원 금지의 헌법재판소법 제 68조는 입법 쿠데타에 의해 발생한 것이므로, 김선수가 주장하는 헌법 개정이 아니라, 하위 법률만 고치면 된다. 입법쿠데타에 의해 발생한 위 제 68조의 헌법소원 금지 규정을 없애면 되는 것이다.
셋째, 김선수는 헌법재판소에 재판소원을 허용하면, 4심제가 되어 비용이 더 많이 들게 되므로, 부자에게 유리하고 돈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는 불리하다고 하는 의견을 냈다. 여기서 김선수는 주객을 전도하고 있다. 재판의 기본은 공정인데, 김선수에 따르면, 대법원 3심까지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에도, 돈이 없는 가난한 이들은 그만 입 다물고 있으라는 뜻이다.
김선수는 재판소원 허용이 갖는 예방적 효과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 재판소원을 불허한 경우, 일반법원의 횡포가 지금같이 더 심해질 것이나, 헌재에서 재판소원을 받는 경우. 대법원까지의 3심 재판이 절로 정화되는 효과를 가진다는 점을 외면한 것이다.
가난한 이가 돈이 없어 재판의 공정을 구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면, 국가에서 그 소송 비용을 부담하는 제도를 만들면 된다. 부자와 가난한 이가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 있다면, 재판의 공정을 구하는 데 형평을 기하도록 정부가 빈자에게 소송비용을 보조해야 한다. 소송비용 보전제도는 현재 유럽에서 시행하고 있다. 가난하니 억울해도 재판의 공정을 구하는 데 천착하면 안 된다는 김선수의 논리는, 가난하면 억울해도 재판소에 들락거리지 말라는 뜻이다.
넷째, 대법관은 비법조인 아닌 법조인 ‘법관’으로만 구성되어야 한다는 김선수의 주장이 갖는 문제점이다. 김선수는 헌재에 기본권 침해 여부를 심판하는 재판소원 도입을 전제로 하는 경우, 헌재 재판관의 자격요건에서, 법관 출신인 경우 대법관보다 더 강화해야 하고, 비법조인으로 자격을 확대하는 다양한 방안 도입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다.
대법관과 헌법재판관을 구별하는 김선수의 이 같은 주장도 자의적익고 그 근거가 불확실하다. 일본뿐 아니라 미국에도 헌재라는 제도가 없고, 법률의 위헌성을 일반 재판소에서 판단한다. 일본이나 미국에서 법률위헌성 심판을 일반 재판소에서 한다는 것은 구태여 헌재를 만들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대법원도 헌재도 다 같이 기본권을 침해하면 안 되는 것이고, 헌재는 한번 더 감독하는 것뿐이다.
정주백 교수의 반론에 따르면, 우리 헌법은 법관의 자격을 스스로 정하지 않고 법률로 정하도록 하고 있다(제 101조 제 3항). 그래서 법관(대법원장, 대법관, 판사)의 자격을 법원조직법 제 42조에서 정하고, 법률에서 법관의 자격을 정하면 법관이 될 수 있다. 사법시험에 합격해야 변호사, 법관이 될 수 있다는 헌법적 제약은 없다. 법률에 규정된 사항을 위헌이라 주장할 수가 없다.(참조 사이트: 최창호 변호사 사이트 https://m.blog.naver.com/cchchw/223897211774)
참고로, 재판은 법조인이 아니라, 원래 시민 민중이 상식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전기 아테네 민주정치의 전통이다. 법조인이 시민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조적인 지위에서 상식을 따라야 한다. 예를 들면, 북한의 경우, 1심의 3명 판사 중, 2명은 시민이고 1명만 법조인이다. 이 3명은 똑같은 권한을 가지고 재판한다.
다섯째, 대법관 증원에 반대하면서, 오히려 하급심 재판관을 늘려서 돈독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도, 김선수는 필연적 이유를 제시하지 않았다. 부실하게 이루어지는 하급심을 위해 법관 수를 늘려야 한다면, 대법원도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사실 하급심이나 대법원이나 법관들은 산하 연구관들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 현재 법관 인력으로 그 많은 사건들을 직접 다 들여다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김선수가 대법관 수를 늘리는 데 반대하는 것은, 법관에 종속되어 온갖 검토의 실무를 담당하는 연구관의 인력을 하위에 두고 이용하겠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법원 내의 불평등한 계층 구조를 지속시키고, 최종의 결정권만 소수의 법관들이 갖겠다는 심중을 드러낸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김선수는 자신의 글에 대한 반론을 의식한 변론에서, “일선 법관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법관으로서의 책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방향으로 법원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일선 법관들은 나름대로 책임감 있게 일하고 있다. 그분들이 법원조직에 대해 희망을 잃고 자존감도 상실한다면, 개혁의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다” 등 발언을 했다.(한겨레, 2025.6.25.)
김선수는 반론 앞에서도 여전히 현실 감각이 없는 것 같다. 문제의 핵심은 법관의 자긍심이 아니라, 일탈한 법관의 판결에 의해 고통당하는 시민, 국민 민중이다. “법관이 책임감 있게 일하고 있다”고 강변할 것이 아니라, 만에 하나라도 있을 수 있는 사법권력의 오남용에 대한 제어 장치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저명 법학자들이 대법원 증원에 반대하면서, “대법원 증원하면 재판이 지연되고, ‘법의 지배’가 무너진다”, “여당 주도로 급격히 추진되는 과정에서 대법관 구성이 특정 정파에 쏠릴 가능성이 크다” 등 의견을 피력했다고 한다.(뉴데일리, 2025.6.14.)
이른바 ‘저명 법학자들’의 이 같은 주장은 재판의 지연은 염려하나 공정성 없는 재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음을 드러냈다. 이들은 ‘법의 지배’라는 이름으로 무수한 사법피해자들을 만들어내는 원흉이다. 또 ‘특정 정파’ 운운하는 이들 ‘저명 법학자들’은 아마도 조희대 같은 대법관이 임명되지 않을까 봐 걱정할 뿐, 공정 아닌 신속성을 준거로 하는 ‘법의 지배’에 의해 고통받는 사법피해자가 안중에 없는 것이 틀림없다. 이에 ‘저명 법학자들’의 말만 듣고 가만 앉아있다가는 십중팔구 국민 민중은 쪽박 차게 될 전망이다.
가난해서 돈이 없으니 3심으로 끝내자고 하는 김선수는 재판의 지연을 염려하는 이들 저명 법학자들 가운데 일원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재판 지연을 방지하기 위해서 ‘법의 지배’를 내세워 4심을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재판을 끝내기 위해서는 공정한 판결이 우선해야 한다. 불공정한 판결을 두고 그대로 재판이 끝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헌재 제도 자체의 유무와 무관하게, 재판이 잘못된 것이라면, 3심으로 막을 것이 아니고, 바로 될 때까지, 3심 너머에서라도 해야 한다.
헌재의 재판소원 도입, 법관 수의 증원 등은 시민 민중의 공정한 재판 받을 권리 보장, 법관의 일탈에 대한 견제, 법원 내의 계층 구조의 민주화 등을 위한 지름길이 된다. 이 모든 것에 반대하는 김선수는, 진보 성향의 법관이라는 명성과는 반대로, 결과적으로 법원 내 봉건적 위계 및 법관의 일탈을 방조하자는 집단의 기수로 보인다.